금융
일본은 들어갔는데 한국은 빠졌다…달러 스테이블코인 결제망서 밀리는 K금융
투데이e코노믹 = 박재형 기자 | 미국과 유럽, 일본의 대형 금융회사들이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글로벌 결제망 구축에 나섰다. 아시아 금융회사 가운데 일본 MUFG은행이 참여한 반면 한국 은행은 단 한 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21곳 연합, 아시아 몫은 MUFG 한 자리 골드만삭스와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씨티, 도이체방크 등 21개 금융기관은 1일(현지시간) 공동 성명을 통해 올해 하반기 발행 법인을 설립하고 내년 상반기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시장에 내놓겠다고 밝혔다. 신설 법인의 명칭은 추후 공개하기로 했다. 지역별 구성을 보면 한국의 위치가 더 분명해진다. 북미에서 골드만삭스와 BofA, 씨티 등 10개 금융기관이 참여하고 유럽에서는 도이체방크와 UBS, 산탄데르, BBVA 등 8곳이 합류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미쓰비시UFJ은행(MUFG)이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으며 중동과 아프리카 금융기관도 각각 한 곳씩 참여한다. 이 프로젝트가 처음부터 이런 규모였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10월 10개 은행의 참여로 처음 공개된 뒤 참여 기관이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열 달 사이 몸집이 두 배가 되는 동안 한국 금융회사는 논의 테이블에 앉지 못했다는 뜻이다. 사업 범위도 좁지 않다. 이들은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규제 법안인 지니어스법과 유럽연합(EU)의 가상자산 규제 기본법안(MiCA)을 모두 준수한다는 방침이며,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국경 간 송금과 디지털자산 결제 시장을 공략한다. 금융기관 간 도매 결제뿐 아니라 기관투자자와 일반 소비자가 이용하는 리테일 시장까지 사업 영역으로 삼는다. 달러 출시 이후에는 유로화를 우선 검토하고 다른 주요 7개국(G7) 통화 연동 스테이블코인으로 영역을 넓힐 계획이다. 기술이 아니라 제도가 갈랐다 한국 은행의 블록체인 역량이 부족해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국내 은행들은 이미 관련 기술을 상당 부분 축적해왔다. 신한은행은 2023년 헤데라 해시그래프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해외송금 기술 테스트를 진행했고, 은행권 최초로 스테이블코인 관련 상표권을 등록한 데 이어 한국은행의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 실증 사업에서 관련 인프라를 직접 개발했다. KB국민은행도 지난해 6월 시중은행 가운데 처음으로 'KBKRW' 'KRWKB' 'KBST' 등 원화 스테이블코인 상표권을 특허청에 출원했고, 올해 3월에는 한국은행이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과 함께 주관하는 디지털화폐 실증 사업 '프로젝트 한강' 2단계에 참여했다. 문제는 이 기술을 담을 법적 그릇이 없다는 데 있다. 미국은 지니어스법, EU는 MiCA라는 규제 체계를 이미 갖췄고 글로벌 은행 연합은 그 두 법을 준수 기준으로 못 박았다. 반대로 말하면 준거법이 없는 나라의 은행은 애초에 참여 요건을 맞추기 어렵다. 일본의 투트랙은 이미 한국 매장까지 들어왔다 일본은 스테이블코인을 자금결제법상 전자지급수단으로 규정한 뒤 시장을 열었다. SBI신세이신탁은행이 발행하고 SBI VC트레이드가 유통하는 엔화 스테이블코인 'JPYSC'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신탁은행이 발행한 엔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으로, 기존 자금이체형 스테이블코인이 거래와 잔액을 모두 100만 엔으로 제한받았던 것과 달리 한도가 없다는 점이 차별점이다. 메가뱅크도 따로 움직인다. 미쓰비시UFJ은행과 미쓰이스미토모은행, 미즈호은행 등 3대 은행은 통일된 기술 표준을 기반으로 스테이블코인을 공동 발행하고 미쓰비시UFJ신탁은행이 수탁기관을 맡는 구조의 시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세 은행이 공동 투자한 플랫폼을 기반으로 설계됐으며 미쓰비시상사가 국내외 지점 간 국경 간 결제 실험을 수행한다. 보도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는 기업 간(B2B) 결제를 겨냥해 2028년까지 약 1조 엔 규모를 목표로 하며, 발행 시점은 2027년 3월 말로 계획돼 있다. 주목할 대목은 실생활 결제다. 일본 편의점 로손은 판매정보 관리시스템(POS)과 연동한 엔화 스테이블코인 JPYC 결제 시스템을 도쿄 다카나와 게이트웨이 시티점에서 실증하기로 했고, 앞서 오사카의 오코노미야키 전문점과 도쿄·지바현 치과의원 등에서도 JPYC 수납이 시작됐다. 그 결제망은 이미 국경을 넘었다. JPYC 이용자는 유니파이 미니앱에서 올리브영 모바일 상품권을 구매해 국내 매장 셀프 계산대에서 결제할 수 있고, 올리브영뿐 아니라 다이소·CU·이마트 등의 상품권도 JPYC로 살 수 있다. 일본 관광객의 한국 소비가 엔화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이 발행 주체 논쟁을 하는 사이 남의 통화로 만든 디지털 화폐가 국내 소매 결제의 뒷단에 먼저 들어왔다. 한국은행이 신중한 이유 당국의 경계에도 근거가 있다. 한국은행이 3일 발표한 'BOK 이슈노트: 달러 스테이블코인과 외환시장 간 연계성' 보고서에 따르면 바이낸스에서 유로화, 튀르키예 리라화 등 특정 국가의 법정통화와 달러 스테이블코인 간 거래를 지원한 결과 스테이블코인이 실제 달러 가치보다 비싸게 거래되는 정도(프리미엄)가 0.33~0.38%포인트 유의하게 줄었다.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와 달리 해외 거래소에는 유동성공급자(LP)와 전문 시장조성자, 헤지펀드 등 글로벌 중개 기관이 활동하는데, 이들이 참여하면 스테이블코인 수요 충격이 환율에 영향을 주면서 해당 법정통화와 대미 달러 환율 간 관계도 강화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한국이 이 충격에서 비켜서 있는 것은 제도 덕이 아니라 시장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한국의 경우 매수 압력이 외환시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대신 국내 거래소 내 스테이블코인 가격 프리미엄, 이른바 김치 프리미엄을 높이는 방향으로 흡수됐다고 짚었다. 보고서를 작성한 김지현 국제금융연구팀 과장은 "원화 국제화와 외환시장 구조 개선은 시장참여자 기반과 외환시장 유동성을 확대해 충격을 완충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규제를 미루자는 얘기가 아니라, 개방과 완충장치를 함께 설계하라는 주문에 가깝다. 컨소시엄 짜기부터 막혀 있는 은행권 국내 논의는 발행 주체에서 멈춰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은행 중심 컨소시엄(은행 지분 50%+1주)이 발행하도록 하는 방안과 디지털자산 거래소 대주주의 지분율을 10~15%로 제한하는 방안을 두고 업계의 반발이 거세며, 거래소 지분 제한안은 여당 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국회에는 민병덕·김은혜 의원 등이 발의한 관련 법안 10건이 계류 중이다. 정부안은 아직 국회에 가지 못했다. 유동수 국회 정무위원장은 3일 "아직 정부안이 안 왔다"며 금융위원회로부터 안이 와야 한다고 말했다. 민병덕 의원은 같은 날 "수많은 의원들의 법안이 있는데 왜 우리가 정부안을 이렇게 기다리면서 질질 끌고, 그 사이 미국과 일본은 가버리고 있느냐"며 정부안 제출 여부와 무관하게 9월 말 디지털자산기본법 공청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제도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은행들은 자리싸움부터 시작했다. 하나금융은 스테이블코인 발행 컨소시엄에 BNK금융(부산·경남은행), iM금융(iM뱅크), SC제일은행, OK저축은행, JB금융(광주·전북은행) 등 은행 기준 6곳을 확보했다. 은행법상 은행은 다른 회사 지분을 15%까지만 보유할 수 있어 발행사에서 은행들이 50%+1주를 가지려면 최소 4곳 이상이 필요한데, 국내 은행은 전국 단위 7곳과 지방은행 5곳, 인터넷은행 3곳, SC제일은행을 합쳐도 15곳 안팎에 그친다. 가능한 컨소시엄 수 자체가 산술적으로 몇 개 되지 않는 구조다. 그 사이 해외 발행사는 진입 채비를 마쳤다. 테더는 지난 5월 국내에서 테더 로고와 자사 스테이블코인 USAT, 금 기반 디지털자산 테더골드(XAUT) 등 8건의 상표를 출원했다. 늦게 들어가면 유통·환전 사업자로 남는다 글로벌 은행들이 발행과 결제, 청산, 환전 구조를 먼저 세우면 국제 디지털 결제시장의 표준도 이들이 쥐게 된다. 한국 금융회사가 뒤늦게 들어갈 경우 결제망을 설계하는 사업자가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해외 스테이블코인을 국내에 유통하거나 환전하는 역할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국제 금융에서 결제망은 그 자체가 영향력이고, 미국이 달러로 행사해온 힘의 상당 부분도 달러 중심 결제 인프라에서 나왔다. 물론 은행 연합의 성공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지난해 스테이블코인을 출시한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의 코인은 유통량이 약 1250만 달러에 그쳐 은행이 발행한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실제 수요는 아직 제한적이다. 은행권 스테이블코인이 테더의 USDT나 서클의 USDC를 대체할지는 검증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표준을 만드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과 결과를 지켜보는 것은 다르다. 규제를 완벽하게 다듬은 뒤 진입하는 전략이 반드시 안전하지도 않다. 금융산업에서는 인프라를 먼저 구축한 쪽이 규칙을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은 달러 결제망 안에 들어가면서 엔화 생태계를 따로 키우는 길을 택했고, 한국은 아직 첫 번째 선택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