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e코노믹 = 박재형 기자 | 중동 지역의 군사적 긴장이 급격히 고조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 전반에 위험자산 회피 심리가 확산되고 있다. 미국과 이란 간 무력 충돌이 현실화되고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협이 제기되자 기술주 중심의 글로벌 IT 기업 주가도 지정학적 리스크의 직격탄을 맞으며 변동성이 크게 확대되는 모습이다. 특히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시장이 에너지 수입 의존도라는 구조적 취약점으로 인해 선진국 대비 월등히 큰 충격을 받고 있다는 점이 이번 사태의 특징이다.
■ 미국 빅테크, 단기 조정 속 혼조세
뉴욕증시에서도 주요 빅테크 기업 주가는 단기 조정 국면에 들어섰다. 나스닥 종합지수는 이란 전쟁 장기화 우려가 본격화된 이후 하락 압력을 받고 있으며,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는 4.58% 급락하며 반도체 업종 전반에 매도세가 확산됐다. NVIDIA는 1.33%,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는 7.99% 하락하며 AI 반도체 섹터의 조정을 이끌었다. 반면 다우존스와 S&P500 지수는 저가 매수세가 유입되며 혼조 마감하는 등, 미국 증시 내에서도 업종 간 차별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시장 전문가들은 전쟁 자체가 IT 산업의 펀더멘털을 직접 훼손한다기보다는, 금리·에너지 가격·공급망 불안이라는 간접 요인을 통해 기술주에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한다. 기술 기업들은 장기 성장 기대가 높아 금리와 글로벌 경기, 지정학적 변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한국, 아시아 중 낙폭 최대… '구조적 취약성' 노출
이번 지정학적 위기에서 가장 심각한 충격을 받은 시장은 단연 한국이다. 연초부터 2월 말까지 코스피가 48.17% 급등하며 세계 주요 지수 중 압도적 1위를 기록했던 한국 증시는 중동 전쟁 발발과 함께 사흘 만에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지난 3일 코스피는 452.22포인트(7.24%) 급락한 5,791.91로 마감하며 2024년 8월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했고, 4일에는 추가로 12% 이상 폭락하며 5,000선 붕괴를 눈앞에 두는 극단적 상황까지 연출됐다. 이는 2001년 9·11 테러 직후(-12.02%) 이후 최대 하락률에 해당한다. 코스닥도 4일 기준 14% 급락하며 역대 최대 하락률을 기록했다.
한국 IT 대장주들의 타격도 극심했다. 삼성전자는 사상 최고가(21만8000원)를 달성한 지 사흘 만에 17만원대까지 추락하며 11%대 낙폭을 기록했고, SK하이닉스도 100만원 선이 무너지며 11.5% 급락했다. 사흘간 양사의 시가총액만 400조원 이상이 증발한 것으로 집계됐다.
전문가들은 한국 증시가 유독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로 중동 원유에 대한 구조적 의존도를 지목한다. 한국은 전체 원유 도입량의 약 70%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95% 이상이 이란이 봉쇄 카드를 꺼낸 호르무즈 해협을 경유한다. 대신증권 이경민 연구원은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돌파했고 중동 전면전 우려와 유가 폭등 여파가 겹치며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최초로 대내외 불안이 동시에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 아시아 시장 전반으로 충격 확산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아시아 주요 증시도 일제히 타격을 받았다. 일본 닛케이225지수는 3일 전 거래일 대비 1,778포인트(3.06%) 하락해 5만6,279를 기록했으며, 장중 5만6,000선마저 위협받았다. 닛케이는 원유 가격 급등에 따른 경기 침체 우려가 확산되며 다양한 업종에서 동시다발적 매도세가 쏟아진 결과라고 분석했다.
대만 가권지수도 0.90% 하락한 3만5,095에 마감했으며, 홍콩 항셍지수는 2.14% 급락했다. 인도 SENSEX 지수도 1.82% 하락했다. 반면 중국 상하이종합지수는 이번 사태에서 유일하게 0.48% 소폭 상승하며 예외적인 흐름을 보였는데, 이는 중국이 러시아와의 에너지 협력을 통해 중동 원유 의존도를 상대적으로 낮췄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일본과 한국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배경에는 공통적으로 높은 중동 원유 의존도와 수출 중심의 제조업·IT 산업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대만은 TSMC를 비롯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거점이라는 점에서 지정학적 불안이 장기화될 경우 추가적인 하방 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경계감도 형성되고 있다.
■ 기술주에 작용하는 세 가지 간접 경로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 위기가 IT 기업의 실적에 영향을 미치는 경로를 크게 세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는 금리 상승 압력이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현실화되면서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배럴당 84달러를 돌파하고, WTI도 77달러를 넘어섰다. 에너지 비용 급등은 전방위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이어져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 시점을 지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국투자증권 최고운 연구원은 호르무즈 봉쇄가 30일 이상 지속될 경우 유가가 배럴당 120~150달러까지 상승하고 글로벌 경기 침체 확률이 75%를 넘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둘째는 반도체와 IT 공급망 리스크다. 글로벌 반도체 산업은 복잡한 국제 공급망에 의존하고 있으며, AI 서버·데이터센터 장비·네트워크 인프라 등 핵심 IT 설비는 여러 국가의 부품과 소재가 결합되는 구조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 에너지 운송뿐 아니라 관련 물류 비용 전반이 급등하고 공급망 불확실성이 증폭된다.
셋째는 투자 심리 변화다. 글로벌 불확실성이 커질 때 자금은 고성장 기술주에서 에너지·방산·원자재 등 전통 섹터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이번 사태에서 방산주와 정유주는 급등한 반면 반도체·IT주는 급락하는 뚜렷한 자금 로테이션이 확인됐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코스피에서만 단 하루 5조1,731억원을 순매도하며 역대 두 번째 규모의 이탈을 기록했다.
■ 전망: 단기 변동성 vs 장기 성장 동력
향후 전망을 둘러싸고 시장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현대차증권 김재승 연구원은 "과거 중동 사례를 보면 한 달 안에 코스피는 회복됐고, 반도체 업종 펀더멘털은 전쟁과 무관하다"며 단기 전쟁에 그칠 경우 빠른 회복 가능성을 제시했다. 동국대 박선영 교수도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실적이 견고한 만큼 전쟁이 단기에 종료된다면 조정도 빠르게 마무리될 수 있다고 봤다. 하나증권은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는데, 1~2주 단기 충돌 시 빠른 회복이 가능하지만 호르무즈 해협이 완전 봉쇄되고 무력 충돌이 30일을 초과할 경우 코스피가 최대 20% 추가 하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장기적으로는 IT 산업의 구조적 성장 전망이 크게 훼손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여전히 우세하다. AI 인프라 투자 확대, 클라우드 컴퓨팅 수요 증가, 데이터센터 건설 붐 등 기술 산업의 핵심 성장 동력은 지정학적 변수와 무관하게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키움증권은 시장 급락 이후 오히려 삼성전자 목표주가를 21만원에서 26만원으로, SK하이닉스를 110만원에서 130만원으로 상향 조정하며 중장기 반도체 업황에 대한 낙관론을 유지했다.
결국 이번 사태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IT 기업의 실적 자체보다는 투자 심리와 금융 환경을 통해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경로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특히 한국을 비롯한 에너지 수입 의존형 아시아 경제국들이 중동 리스크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재확인시켜줬다는 점에서, 향후 공급망 다변화와 에너지 안보 전략이 금융시장 안정성과 직결된 과제임을 시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