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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일반/과학

[박재형 칼럼] 침묵이 범죄를 키운다: 대기업 성비위의 구조적 공범들

 

투데이e코노믹 = 박재형 기자 | 최근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대기업들에서 연이어 불거지는 성비위 사건과 그에 대한 미온적 대응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건 하나하나를 떼어 놓고 보면 ‘불행한 일탈’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반복성과 처리 방식은 이것이 개인 문제가 아니라 조직의 구조적 병리임을 분명히 말해준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와 언론을 통해 드러난 여러 사례들은 공통된 패턴을 가진다. 피해자가 용기를 내 문제를 제기하면, 조직은 진상 규명보다 먼저 ‘파장 관리’에 들어간다. 그리고 가해자에게 내려지는 것은 대개 감봉, 정직, 전보 같은 상징적 징계다. 이쯤 되면 기업 내부의 성폭력은 범죄가 아니라 ‘관리 대상 리스크’로 취급되고 있는 셈이다.

 

솜방망이 처벌이 만든 ‘구조적 방임’

 

성비위는 단순한 직장 내 갈등이 아니다. 위계와 권력을 이용한 폭력이며,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는 중대한 범죄다. 그럼에도 많은 기업들은 이를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징계” 수준으로 축소한다. 정직 몇 개월, 지방 발령, 대기발령…. 이런 조치가 피해자에게 어떤 의미일까. “가해자는 곧 돌아온다”는 통보와 다름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징계 기간 중 가해자의 ‘자진 퇴사’를 허용하는 관행이다. 이는 사실상 경력 세탁의 출구를 열어주는 행위다. 징계 해고가 아닌 ‘정상 퇴사’로 기록된 가해자는 아무런 불이익 없이 또 다른 조직으로 이동할 수 있다. 피해자는 삶이 무너졌는데, 가해자는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하는 역설이 만들어진다.

 

이것이야말로 조직에 의한 ‘구조적 방임’이다. 시스템이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가해자를 다시 사회로 내보내 또 다른 위험을 확산시키는 구조다. 이것은 행정의 실패가 아니라 윤리의 붕괴다.

 

은폐와 압박, 그리고 침묵의 카르텔

 

사건이 외부로 알려질 조짐이 보이면, 기업은 곧바로 ‘위기 관리’ 모드로 전환한다. 내부 게시글은 삭제되고, 문제 제기는 ‘2차 피해 방지’라는 명분 아래 통제된다. 언론 보도에는 직·간접적인 압박이 가해지고, 사건은 조용히 사라진다.

 

하지만 이런 침묵은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를 고립시키고, 조직 구성원들에게 “여기서는 말해도 소용없다”는 신호를 보낸다. 이 두려움과 체념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침묵의 카르텔’이다. 그래서 수많은 성폭력은 드러나지 못한 채, 조직의 어두운 내부에 묻혀왔다.

 

이제는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기업이 정말 ‘사람이 우선’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성비위에 대해서만큼은 관용 없는 원칙이 필요하다.

 

첫째, 성비위 가해자에 대해서는 일벌백계가 적용돼야 한다. 파면, 해임 등 실질적 퇴출이 기본이 되어야 하며, 퇴사로 책임을 회피하는 길을 제도적으로 차단해야 한다.

둘째, 피해자는 조직 안에서 보호받아야 한다. 즉각적인 분리 조치, 외부 독립기구에 의한 조사, 심리·법률 지원이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

셋째, 위계와 침묵이 지배하는 조직 문화를 깨야 한다. 누구나 보복 걱정 없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구조가 없다면, 어떤 윤리 규정도 무의미하다.

 

기업의 성장은 사람 위에 세워질 수 없다. 가해자를 감싸는 조직은 결국 스스로의 신뢰를 파괴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침묵 속에서 고통을 견디고 있다. 더 이상 ‘악어의 눈물’은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인정과 단절, 그리고 근본적인 변화다. 침묵의 카르텔을 깨지 않는 한,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