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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일반/과학

"공급 부족 끝났다" vs "내년엔 더 모자란다"…메모리 호황, 누구 말을 믿어야 하나

에이서 회장 "모두 재고 쌓아둬"…같은 날 반도체 수출은 역대 최대
CXMT 5세대 D램 양산, 트렌드포스는 "2027년 부족 더 심해진다"

투데이e코노믹 = 이혜진 기자 | 21일 관세청 발표 숫자는 화려했다. 9월 1~20일 수출액(통관 기준 잠정치)은 714억달러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78.3% 늘었다. 종전 최대였던 올해 6월 617억달러보다도 97억달러 많다.

 

주인공은 반도체였다. 반도체 수출은 259.4% 증가한 341억2000만달러를 기록했다.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 비중은 작년보다 24.1%포인트 커진 47.8%로, 1~20일 기준 역대 최대다. 반도체 외 품목은 온도차가 컸다. 석유제품이 47.8%, 승용차가 9.3% 늘었지만 무선통신기기는 0.4% 줄었다.

 

같은 날 대만에서는 이 호황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 전해졌다. 발언의 주인공은 메모리를 대량으로 사들이는 PC 제조사의 수장이다.

 

"어떻게 계속 부족하겠나"

 

대만 경제일보 등에 따르면 천쥔성 에이서 회장은 19일 한 포럼에서 메모리 공급 부족은 없다며, 중국의 생산능력이 계속 나오고 있어 부족 문제는 이미 사라졌다고 말했다. 메모리 계약가격도 지금 고점에서 오르내리는 혼조세라고 진단했다.

 

그의 비판은 메모리 업계의 가격 전망을 겨냥했다. 천 회장은 "사실 모두 재고를 가득 들고 있다"고 했다. 중국 메모리 업체들을 '가격 파괴자'로 지목하며, 물량이 계속 풀리는 한 가격 상승세가 이어지기 어렵다고 봤다.

 

가격 고점 시점도 제시했다. 그는 2027년 1분기까지 PC 가격이 더 오를 수 있지만, 증설 물량이 나오는 내년 중반쯤 부품 가격이 고점을 찍고 안정될 수 있다고 봤다. 다만 반전 시점은 누구도 모른다며 한발 물러섰다.

 

CXMT가 던진 '50%'라는 숫자

 

천 회장 발언에 무게를 싣는 움직임이 중국에서 나왔다. 중국 최대 D램 업체 CXMT는 5세대 D램 기술 플랫폼 양산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새 플랫폼은 4세대보다 웨이퍼 한 장에서 뽑는 칩 수가 최소 50% 늘어난다. 이를 적용한 24Gb LPDDR5X 제품 2종도 양산 중이다.

 

웨이퍼당 칩 수가 절반 넘게 늘면 같은 설비로 더 많은 물량을 찍어낼 수 있다. 원가도 그만큼 내려간다. 에이서 회장이 말한 '가격 파괴'가 구호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근거다. 로이터도 이번 기술 진전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과 경쟁하는 CXMT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조사기관 전망은 정반대

 

시장조사업체의 판단은 다르다. 트렌드포스는 AI 서버와 HBM 수요 확대로 D램 공급 부족이 2027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본다. 내년에도 수요 증가가 공급 확대를 웃돌아 부족이 올해보다 심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쪽은 "부족은 끝났다"고 하고, 다른 쪽은 "내년이 더 심하다"고 한다. 둘 다 틀렸다기보다 보고 있는 시장이 다르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근거는 천 회장 본인의 말 속에 있다. 그는 LPDDR5와 DDR5-9600 같은 고성능 메모리는 여전히 공급이 부족하지만, DDR4 등은 파는 사람은 많고 사는 사람은 적다고 했다.

 

즉 구형 범용 D램은 이미 공급이 넘치기 시작했고, AI 서버와 최신 기기에 들어가는 고성능 제품은 여전히 모자란다. 트렌드포스가 부족의 원인으로 AI 서버와 HBM을 꼽은 것과 맞물린다. 에이서의 발언은 메모리 시장 전체보다 PC용 범용 제품에 대한 진단으로 읽는 것이 정확하다.

 

사는 쪽의 말은 걸러 들어야

 

발언자의 처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에이서는 메모리를 파는 회사가 아니라 사는 회사다. 메모리 가격이 오르면 원가 부담이 바로 커진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올해 초 고사양 플래그십 기기의 경우 메모리 비용이 전체 부품원가(BoM)의 20% 이상을 차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에이서 스스로도 가격 부담을 인정했다. 천 회장은 고객들이 불평하면서도 서로 물건을 가져가려 한다며, 올해 4분기에도 제품에 따라 판매가격이 5~20% 오를 것으로 봤다. 공급 부족이 "완전히 사라졌다"면서 제품 값은 최대 20% 올린다는 말은 쉽게 맞물리지 않는다. 구매 협상을 앞둔 수요 기업이 가격 하락 기대를 띄우는 것은 업계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흘려들을 말도 아니다. 메모리 업황은 늘 수요 기업의 재고에서 먼저 꺾였다. 고객사 창고에 물건이 쌓이면 다음 분기 주문이 줄고, 계약가격이 뒤따라 내려가는 순서다. 에이서가 말한 '재고'가 고객사 재고를 뜻한다면, 이는 제조사 재고보다 먼저 봐야 할 선행 신호다.

 

쏠림이 클수록 작은 균열도 크게 흔들린다

 

이 논쟁이 한국에 유독 민감한 이유는 쏠림 때문이다. 수출의 절반이 반도체다. 증시도 비슷하다. 올해 5월 기준 코스피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비중은 이미 50%를 넘어섰다.

 

경고는 전부터 나왔다. 미국 CNBC는 지난 5월, AI 덕분에 메모리의 호황·폭락 주기가 사라졌다는 믿음이 주가를 떠받치고 있지만, 많은 전문가는 업종 특유의 주기성을 잊는 게 위험하다고 본다고 전했다. 한 자산운용 전문가는 "사이클은 사라졌다"는 주장이 나올 때마다 업황이 급격히 꺾이곤 했다고 지적했다.

 

지금 당장 호황이 끝난다는 증거는 없다. 오늘 나온 수출 숫자가 그 반대를 말한다. 다만 판단 기준은 분명해졌다. HBM과 서버용 고성능 D램의 부족이 이어지는 한 한국 메모리 업체의 실적은 버틴다. 반면 DDR4 같은 범용 제품에서 CXMT의 물량이 가격을 끌어내리기 시작하면, 수출 증가율부터 둔화 신호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다음 확인 지점은 이달 말 나올 9월 D램 고정거래가격과 다음 달 초 9월 전체 수출 통계다. 범용 제품 가격이 먼저 꺾이는지, 반도체 수출 증가율이 얼마나 유지되는지가 에이서 회장의 말이 경고였는지 협상용 엄포였는지를 가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