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e코노믹 = 박재형 기자 |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올해 2월 23일 아침, 미군과 이스라엘이 이란 핵시설과 군 지휘부를 동시 타격했다. 하메네이를 포함한 이란 최고 지도부가 제거됐고,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 위기에 빠졌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난 지금, 총성은 멎었지만 세계 경제 지형은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수정경제전망에서 미-이란 전쟁을 올해 경기 변수의 핵심으로 꼽으며 "2분기 중 협상이 타결되고 여름 전후로 유가가 하향 안정화되는 시나리오"를 전제로 한국 성장률을 2.7%로 올려 잡았다. 낙관 시나리오다. 그러나 전쟁이 남긴 구조적 변화는 유가가 내려간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에너지 패권: 호르무즈가 바꾼 지도
이번 전쟁에서 미국이 노린 것은 단순한 이란 무력화가 아니었다. 중국의 핵심 자원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전 세계 석유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 중국은 원유 수입의 약 40%를 이 길목에 의존한다.
이스라엘 네타냐후가 전쟁 직후 다시 꺼낸 카드가 얀부-에일라트 송유관 구상이다. 사우디 홍해 연안에서 이스라엘 지중해 항구까지 육상으로 석유를 보내는 파이프라인이다. 이게 현실화되면 걸프 석유가 호르무즈를 거치지 않고 유럽으로 직행한다. 아시아 구매자에게는 더 비싸지고 유럽에는 더 저렴해지는 구조다. 에너지 흐름이 중국에서 미국 동맹국 쪽으로 재배치된다.
중국은 이 흐름을 이미 읽었다.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늘리고, 중앙아시아 파이프라인을 확장하며, 아프리카 산유국들과의 에너지 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호르무즈 의존도를 낮추려는 중국의 에너지 다변화 속도가 전쟁 이후 눈에 띄게 빨라졌다.
기술 패권: 반도체가 새로운 핵탄두다
에너지보다 더 치열한 전선이 기술이다. 반도체, AI, 배터리. 이 세 가지가 21세기 경제 패권의 실질적 무기가 됐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미국의 전략은 분명하다. 첨단 반도체 장비와 설계 소프트웨어의 대중 수출을 막고, TSMC와 삼성을 자국 영토 안으로 끌어들이며, 동맹국들과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한다. ASML의 EUV 장비가 중국으로 가지 못하게 네덜란드를 설득한 것도, 일본의 반도체 장비 수출규제를 이끌어낸 것도 같은 그림 안에 있다.
중국은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화웨이가 7나노 칩을 자체 개발해 출시한 건 기술 봉쇄가 완벽하지 않다는 신호였다. 반도체 굴기에 국가 예산을 쏟아붓고 있고, AI 분야에서 딥시크가 서방을 놀라게 한 것처럼 특정 영역에서 비용 대비 성능으로 승부하는 전략을 가져간다. 홍콩대 리청 교수는 최근 보아오포럼에서 "미국이 이란 전쟁과 관세 전쟁, 내부 문화 전쟁까지 세 개의 전쟁을 동시에 떠안으며 스스로 쇠락을 재촉하고 있다"며 "중국이 무리한 급진 정책을 펼치지 않고 현재의 성장 흐름만 유지해도 미국이 스스로 입지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했다. 38년간 미국에서 생활하며 브루킹스연구소 존 손턴 중국센터 소장을 지낸 인물의 말이다.
그렇다고 중국이 안심할 상황도 아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등 분석에 따르면 중국 부동산 위기는 아직 해소되지 않았고, 내수 소비 침체와 청년 실업이 구조적 문제로 남아 있다. AI와 반도체에서 서방의 기술 격차가 좁혀지고 있지만, 미국이 허용하지 않는 핵심 장비와 소프트웨어 접근이 막힌 상태에서의 추격은 속도가 제한된다.
달러 패권: 균열이 생겼다, 그러나 대안은 없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긴 여파를 남길 변화가 달러 패권의 균열이다.
이란 제재 이후 러시아, 이란, 중국이 달러를 우회하는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BRICS 국가들 사이의 위안화 결제 비중이 늘고 있고, 사우디가 위안화 원유 결제를 부분적으로 허용하면서 '페트로달러' 체제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이 베네수엘라, 러시아, 이란 등에 제공한 위안화 대출이 쌓이면서 달러 의존도를 낮추는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달러 패권의 붕괴를 논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전 세계 외환보유고에서 달러 비중은 여전히 58%를 넘는다. 위안화는 3% 미만이다. SWIFT를 대체할 만한 중국 주도 결제 인프라(CIPS)는 아직 규모와 신뢰도에서 달러 시스템의 경쟁자가 되지 못한다. 달러는 미국이 아무리 잘못해도 '가장 덜 나쁜 화폐'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게 미국의 진짜 힘이다.
중국이 이기는 시나리오, 미국이 이기는 시나리오
하버드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의 '투키디데스 함정' 프레임이 다시 주목받는 건 이유가 있다. 역사적으로 패권국과 신흥국이 충돌했을 때 전쟁으로 이어진 경우가 16번 중 12번이었다. 그러나 미-중은 핵 억지력이 있다. 직접 충돌 대신 경제·기술·지정학에서의 소모전이 계속된다.
중국이 유리한 시나리오는 이렇다. 미국이 이란, 우크라이나, 관세 전쟁, 내부 양극화를 동시에 감당하면서 재정이 소진되고 동맹 신뢰가 흔들린다. 유럽이 미국에서 멀어지고 글로벌 사우스가 중국 쪽으로 기운다. 중국은 기다린다. AI와 제조업 경쟁력을 쌓으면서 때를 노린다. 리청 교수가 말한 "10년 뒤 중국 경제가 미국을 추월할 수 있다"는 전망의 배경이다.
미국이 유리한 시나리오는 다르다. 반도체 봉쇄가 중국의 AI 발전을 실질적으로 제한하고, 에너지 흐름 재편으로 중국의 자원 조달 비용이 오르며, TSMC와 첨단 공정이 미국 동맹국 안에서만 돌아가는 구조가 굳어진다. 달러 패권은 흔들려도 대안이 없는 상태가 수십 년 이어진다. 중국 내부의 구조적 문제, 부동산 위기와 인구 감소가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
현실은 두 시나리오 사이 어딘가다. 미국과 유럽·한국·일본·대만으로 이어지는 블록, 중국과 러시아·이란·글로벌 사우스 일부로 이어지는 블록. 세계 경제는 이미 블록화가 진행 중이고, 이번 전쟁이 그 속도를 앞당겼다.
한국이 서 있는 자리
이 패권 경쟁에서 한국의 위치는 불편하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기대온 구조가 더 이상 양립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다.
반도체는 미국 동맹 공급망 안에 있어야 하고, 전기차 배터리는 중국 공급망과 경쟁하면서 유럽·북미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 HMM이 북극항로를 준비하는 것도, 방산 수출이 나토 국가들로 확대되는 것도, 결국 미국 블록 안에서 한국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이다. 그러나 중국과의 교역을 갑자기 끊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닌 것도 현실이다.
미-이란 전쟁은 끝났지만 그 전쟁이 만들어놓은 지형은 오래간다. 에너지 흐름이 재편되고, 기술 봉쇄가 심화되고, 달러 패권에 균열이 생기는 이 변화는 수년이 아니라 수십 년의 시간표 위에서 진행된다. 한국이 그 지형 안에서 어느 쪽도 완전히 잃지 않으면서 살아남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시간이 시작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