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e코노믹 = 유서진 기자 | 오늘 새벽 3시. 정부세종청사 중앙노동위원회 제1조정회의실에서 이틀간 진행된 사후조정이 최종 결렬됐다. 초기업노동조합 최승호 위원장이 직접 결렬을 선언했다. 17시간의 협상 중 실질적인 논의는 거의 없었다고 했다. "가만히 앉아서 대기한 시간만 16시간"이라는 말이 이 협상의 수준을 보여준다.
사측은 기존 성과급 상한제(연봉 50%)에 특별포상을 결합하는 '유연한 보상 제도화'를 제안했다. 노조는 거부했다. 성과급 상한 폐지와 영업이익 15% 지급 제도화, 이 두 가지가 관철되지 않으면 테이블에 앉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최 위원장은 결렬 직후 "파업 종료 시까지 회사와의 추가 대화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는 21일부터 6월 7일까지 18일 총파업이 예정대로 간다.
요구의 실체
노조가 요구하는 건 두 가지다. OPI(초과이익성과급) 상한 폐지, 그리고 영업이익의 15%를 성과급 재원으로 제도화하는 것.
올해 삼성전자 연간 영업이익 컨센서스 기준 15%면 약 40조~50조 원이다. 직원 약 12만 명으로 나누면 1인당 평균 3000만~4000만 원이 추가로 주어지는 셈이다. 현재 상한선인 연봉 50%와 맞물리면 고연봉 직원일수록 수억 원 단위의 성과급이 가능해지는 구조다.
JP모건은 노조 요구가 수용될 경우 삼성전자 영업이익이 최대 12% 증발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주요 테크기업 중 영업이익의 특정 비율을 무조건 성과급으로 지급하도록 명문화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원재 카이스트 교수는 "늘어난 이익을 고스란히 나눠주라는 요구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극복할 투자와 대비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고 했다.
파업이 현실화되면 생기는 일
반도체 팹은 일반 공장이 아니다. 24시간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정밀 연속 공정이다. 파업으로 라인이 멈추면 공정에 투입된 웨이퍼는 전량 폐기해야 한다. 재가동 후 정상 수율을 회복하는 데 파업 기간의 두 배 이상이 걸린다. 18일 파업이면 복구에 한 달 이상이라는 얘기다.
노조 스스로 추산한 피해 규모가 약 30조 원이다. 서지용 상명대 교수는 "글로벌 시장에서 신뢰도 추락은 물론 국내 전체 반도체 업계에도 악영향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고객사 이탈 가능성도 현실 문제다. 삼성 물량이 끊기면 SK하이닉스로 이동하고, 한번 바뀐 공급사를 되돌리는 건 쉽지 않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까지 공개 성명을 냈다. 파업이 현실화될 경우 글로벌 공급망과 경쟁국에 미칠 파장을 우려한다는 내용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코스피 7800을 넘어서며 한국 증시가 글로벌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는 바로 이 시점에 나온 신호다.
산업계로 번지는 '영업이익 N%' 요구
더 걱정스러운 건 전염 효과다. 삼성전자 노조 요구가 관철될 경우 다른 대기업들도 같은 형태의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이미 시작됐다. 카카오 노조는 영업이익의 10%, 삼성바이오로직스 노조는 영업이익의 20%, 현대차 노조는 당기순이익의 30%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나왔다. '이익의 N%' 공식이 산업계 전반으로 퍼지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결국 대기업과 중소기업, 협력사 간의 보상 격차를 더욱 벌려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고착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삼성전자 본사 직원 수만 명이 성과급을 두 배로 올리는 동안, 1·2·3차 협력업체 직원들의 처우가 제자리라면 그 격차는 더 벌어진다.
노조가 외면하는 맥락
노조의 분배 요구는 그 자체로 틀리지 않다. 회사가 57조 원을 버는데 직원에게 돌아오는 몫이 적다면 그것도 문제다. 성과급 산정 기준이 불투명하다는 지적도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노조가 외면하는 맥락이 있다. 이번 57조 실적은 AI 반도체 슈퍼사이클이라는 외부 환경 덕이 크다. HBM 수요가 폭증하고 D램 가격이 90~100% 뛰는 구조적 호황 속에서 나온 숫자다. 이 사이클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2023년 1분기 삼성전자 영업이익은 6000억 원이었다. 불과 3년 전이다. 그때 영업이익의 15%는 900억 원이다. 노조 요구를 제도화한다는 건 호황기의 기준을 불황기에도 적용하겠다는 뜻이다.
삼성전자가 지금 쏟아야 할 돈은 성과급만이 아니다. HBM4 수율 안정화, 파운드리 기술 격차 회복, AI 가속기 경쟁, 차세대 메모리 개발. TSMC와 SK하이닉스, 엔비디아가 멈추지 않는 동안 삼성은 R&D 투자를 줄이면 안 되는 위치에 있다. 57조를 지금 다 나눠가지면, 내년 시장이 바뀌었을 때 싸울 무기가 없다.
5월 21일까지 8일
사후조정이 결렬됐다. 가처분 결과가 남아 있다. 수원지법이 파업 금지 가처분을 인용하면 파업은 법적으로 막힌다. 기각되면 21일 총파업은 예정대로 간다.
노조가 진짜로 원하는 게 분배의 정의라면, 지금처럼 반도체 팹을 인질로 잡는 방식은 스스로의 명분을 갉아먹는다. 공장이 멈추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건 삼성 협력업체 직원들이고, 한국 반도체 산업 전체 신뢰도이며, 결국 삼성전자 주가와 미래 경쟁력이다.
밥그릇은 나눠야 한다. 그러나 밥그릇째 깨버리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


